
북촌 가회동에 위치한 백인제 가옥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한옥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근대 한옥이다. 백인제 가옥은 높은 석축 위에 넓은 정원과 문간채, 사랑채, 안채 그리고 북촌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별당채가 들어서 있다. 백인제 가옥은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여, 건축 규모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북촌을 대표하는 한옥 중 하나이다.



백인제 가옥은 1913년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건립한 이래 한성은행, 최선익 등을 거쳐 1944년 백인제 선생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한상룡이 이 집을 신축했을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총독과 권력가들은 물론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2세도 연회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성은행이 소유했던 시절에는 천도교 단체가 가옥을 임차하여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들의 숙소 겸 회합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가옥은 최선익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최선익은 개성 출신의 청년 부호로, 1932년 27세의 나이로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여 민족운동가인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는 등 민족 언론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1944년 이후에는 당시 국내 의술계의 일인자였던 백인제 선생과 그 가족이 소유하였으며, 건축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서울시에서 인수 후 문화재 개·보수 공사를 거쳤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15년 4월, 백인제 가옥을 역사가옥박물관으로 새롭게 개관하기 위해 개장 준비에 착수했고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전시·체험 공간으로 조성하여 그해 11월 18일부터 일반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했다.




박물관은 바깥주인(사랑방), 안주인(안방), 할머니, 아들 내외(건넌방) 등 가옥에 거주했던 가족구성원에 따라 각 방별로 전시 태마를 구성하였으며, 의걸이장·이층장 등 전통 목가구와 병풍 등 소품 150여 건을 연출 전시했다. 또 마지막 거주자인 백인제 박사와 관련된 사진자료와 의학자료, 골동품 수집 취미 등을 반영한 전시품 30여 점도 전시됐다.









백인제 가옥은 한옥 12채를 합친 넓은 대지에 신축한 한옥이다. 가옥에 사용된 목재는 압록강 흑송(黑松)으로 1907년 경성박람회 때 서울에 처음 소개된 재료를 사용하였으며, 유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부분에서도 근대 한옥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가옥 구성은 대문간채, 중문간채, 안채, 사랑채, 별채, 별당채 등으로 일부 소실되었으나,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대문간채는 높은 석축 위에 솟을대문 형식으로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볼 수 있는 격조 높은 대문을 연상시킨다. 대문간채에서 일각문이나 중문을 지나면 사랑채와 안채를 만날 수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평면의 동선 계획에 있어서도 독특한 면을 볼 수 있었다. 전통한옥과는 달리 두 공간을 연결하는 복도가 있어서 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실내에서 이동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연경당이나, 민형기 가옥 등에서 일부 볼 수 있으나 보통의 방식은 아니다. 안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튼ㅁ자형 한옥으로 안정감 있는 지붕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당에는 3파문 등 여러 의미의 한자가 적혀 있는 화방벽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안채의 내부구성은 전통적인 우물마루와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다락방이 있는 부엌 등 전통한옥의 방식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반면에 사랑채는 팔작지붕을 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넓은 사랑마당과 정원을 간직하고 있고, 붉은 벽돌의 담장이 많이 사용되었다. 대청과 툇마루는 모두 일본식 장마루를 적용했으며, 사랑채 2층은 다다미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듯 백인제 가옥이 처음 지어진 시대를 생각해보면 왜색 느낌이 나는 요소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지붕합각과 화방벽 등 집안 곳곳에서 삼태극 문양이 보이는데 이것은 태극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귀족 가문에 많이 쓰는 삼파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일본 총독이 직접 내려준 것이라고 한다. 본채에는 이 외에도 눈여겨볼 재미있는 요소가 여럿 있다. 하나는 덧달아낸 지붕이 제법 구색을 갖추고 있는 점이다. 서까래에 나무를 대어 탈부착이 가능해 보이고 위에 동판이 덮여 있었다.
또 하나는 그 시대를 반영하는 듯 반공호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백인제 가족이 사용할 당시 이곳에 술을 담가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별당채는 백인제 가옥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누마루에서 바라보면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누마루에 머름은 통머름으로 높이가 1자2치 정도 되어 내부에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그 형태도 소박해 보인다. 창호는 한지와 유리가 혼용된 방식으로 창호의 변형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백인제 가옥에서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반영하는 듯 변형된 한옥의 모습과 일부 왜색이 혼재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건축된 배경을 떠나서 이 땅에 지어진 한옥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백인제 가옥을 운영하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은 유서 깊은 서울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서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심화하는 한편 서울시민 및 서울을 찾는 내·외국인들에게 서울의 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의 기억을 저장하는 서울역사박물관의 목표처럼 백인제 가옥의 역사성과 건축적인 특징도 오래 보존되어 근대적인 한옥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한다.
북촌 가회동에 위치한 백인제 가옥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한옥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근대 한옥이다. 백인제 가옥은 높은 석축 위에 넓은 정원과 문간채, 사랑채, 안채 그리고 북촌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별당채가 들어서 있다. 백인제 가옥은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여, 건축 규모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북촌을 대표하는 한옥 중 하나이다.
백인제 가옥은 1913년 한성은행 전무였던 한상룡이 건립한 이래 한성은행, 최선익 등을 거쳐 1944년 백인제 선생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한상룡이 이 집을 신축했을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총독과 권력가들은 물론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2세도 연회를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성은행이 소유했던 시절에는 천도교 단체가 가옥을 임차하여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들의 숙소 겸 회합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가옥은 최선익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최선익은 개성 출신의 청년 부호로, 1932년 27세의 나이로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여 민족운동가인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는 등 민족 언론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1944년 이후에는 당시 국내 의술계의 일인자였던 백인제 선생과 그 가족이 소유하였으며, 건축적·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2009년 서울시에서 인수 후 문화재 개·보수 공사를 거쳤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15년 4월, 백인제 가옥을 역사가옥박물관으로 새롭게 개관하기 위해 개장 준비에 착수했고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전시·체험 공간으로 조성하여 그해 11월 18일부터 일반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했다.
박물관은 바깥주인(사랑방), 안주인(안방), 할머니, 아들 내외(건넌방) 등 가옥에 거주했던 가족구성원에 따라 각 방별로 전시 태마를 구성하였으며, 의걸이장·이층장 등 전통 목가구와 병풍 등 소품 150여 건을 연출 전시했다. 또 마지막 거주자인 백인제 박사와 관련된 사진자료와 의학자료, 골동품 수집 취미 등을 반영한 전시품 30여 점도 전시됐다.
백인제 가옥은 한옥 12채를 합친 넓은 대지에 신축한 한옥이다. 가옥에 사용된 목재는 압록강 흑송(黑松)으로 1907년 경성박람회 때 서울에 처음 소개된 재료를 사용하였으며, 유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부분에서도 근대 한옥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가옥 구성은 대문간채, 중문간채, 안채, 사랑채, 별채, 별당채 등으로 일부 소실되었으나,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대문간채는 높은 석축 위에 솟을대문 형식으로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볼 수 있는 격조 높은 대문을 연상시킨다. 대문간채에서 일각문이나 중문을 지나면 사랑채와 안채를 만날 수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평면의 동선 계획에 있어서도 독특한 면을 볼 수 있었다. 전통한옥과는 달리 두 공간을 연결하는 복도가 있어서 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실내에서 이동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연경당이나, 민형기 가옥 등에서 일부 볼 수 있으나 보통의 방식은 아니다. 안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튼ㅁ자형 한옥으로 안정감 있는 지붕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마당에는 3파문 등 여러 의미의 한자가 적혀 있는 화방벽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안채의 내부구성은 전통적인 우물마루와 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다락방이 있는 부엌 등 전통한옥의 방식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반면에 사랑채는 팔작지붕을 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넓은 사랑마당과 정원을 간직하고 있고, 붉은 벽돌의 담장이 많이 사용되었다. 대청과 툇마루는 모두 일본식 장마루를 적용했으며, 사랑채 2층은 다다미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듯 백인제 가옥이 처음 지어진 시대를 생각해보면 왜색 느낌이 나는 요소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지붕합각과 화방벽 등 집안 곳곳에서 삼태극 문양이 보이는데 이것은 태극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귀족 가문에 많이 쓰는 삼파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일본 총독이 직접 내려준 것이라고 한다. 본채에는 이 외에도 눈여겨볼 재미있는 요소가 여럿 있다. 하나는 덧달아낸 지붕이 제법 구색을 갖추고 있는 점이다. 서까래에 나무를 대어 탈부착이 가능해 보이고 위에 동판이 덮여 있었다.
또 하나는 그 시대를 반영하는 듯 반공호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백인제 가족이 사용할 당시 이곳에 술을 담가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별당채는 백인제 가옥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누마루에서 바라보면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누마루에 머름은 통머름으로 높이가 1자2치 정도 되어 내부에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그 형태도 소박해 보인다. 창호는 한지와 유리가 혼용된 방식으로 창호의 변형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백인제 가옥에서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반영하는 듯 변형된 한옥의 모습과 일부 왜색이 혼재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건축된 배경을 떠나서 이 땅에 지어진 한옥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백인제 가옥을 운영하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은 유서 깊은 서울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줌으로써 서울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심화하는 한편 서울시민 및 서울을 찾는 내·외국인들에게 서울의 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의 기억을 저장하는 서울역사박물관의 목표처럼 백인제 가옥의 역사성과 건축적인 특징도 오래 보존되어 근대적인 한옥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