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흔적을 살피다 < 플레이스_창덕궁 대조전>
글 박예은 / 사진 강민정

조선 궁궐 안 사람들은 창덕궁 안의 서양식 가구들이 후세 우리에게 '대조전의 옛 모습'으로 소개 될 것을 알았을까.
태종 5년부터 500여 년간 조선의 왕과 왕비가 바뀌며, 그들의 생활공간이었던 대조전은 아마도 주인의 취향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겠다. 또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동안 발생한 화재는 대조전 건물의 굵직한 변화를 주게 되었다. 옛 모습의 옛 모습까지 볼 수는 없어 아쉬움이 들지만, 천장의 샹들리에, 자개로 된 용상과 용무늬 조각 침대 등 조선의 마지막 모습이 그대로 머무른 대조전은 구한 말 왕과 왕비의 일상을 상상하게 했다.

내내 남의 집에 허락 없이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주인을 지목한다면 아마도 조선 마지막 왕비이자 순종의 계비였던 순정효황후가 아닐까 싶다. 특히 대청 왼편 서온돌에 놓여있는 침대를 보며 황후의 마음을 읽어보고 싶었다. 13살 어린 나이에 스무 살 연상의 순종에게 간택되어 대조전에서 대한제국의 멸망과 일제강점기를 겪어낸 순정효황후의 궁중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 윤택영과 숙부 윤덕영 등은 악명 높은 친일파였고, 하루가 멀다고 순종을 괴롭혔다. 아무리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이라 하지만,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검은 속내와 한 나라 국모로서의 지조 사이에서 순정효황후는 몇 날 며칠 잠 못 이루며 갈등했을 것이다. 침대의 낡은 헤짐에서 황후의 뒤척임이 보였다.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시아버지인 고종과 남편 순종은 커피를 즐겨 마셨는데, 이 영향으로 순정효황후도 아침마다 커피와 케이크를 즐겼다.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황후를 떠올려보면 그 모습이 참 재밌다. 당시의 ‘가배’라 불리던 커피는 원두커피였는데, 순정효황후와 2000년대에 조우한다면 따뜻한 라떼 한 잔 함께할 수 있을까. ‘우유 가배’ 라고 소개하면 되겠다. 또 한쪽엔 욕조가 있는 욕실과 이발실도 있었는데, 조선의 궁궐에 근대식 생활 편의 시설이 다양하게 사용됨을 볼 수 있었다. 서양의 문물과 생활을 충분히 즐기던 왕족들의 모습이 색다르다.


대조전에는 왕비의 생활공간 외에도 눈에 띄는 공간들이 있었다. 화려한 나전칠기로 된 용상이 있는 대청을 중심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인 서온돌과 왕의 공간인 동온돌은 여러 개의 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궁녀들이 왕과 왕비를 보좌하기 위해 항시 대기하며 생활하던 공간이다. 겹겹이 쌓인 방들과 복잡한 복도를 지나다녀보니 방이 집 같고 복도가 골목 같았다. 작은 마을처럼 보였다. 옆집 앞집마냥 옹기종기 붙어있는 방들에서 생활하던 궁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궁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된 궁녀들의 첫 업무는 ‘몇 번째 방, 몇 번째 복도’ 하며 그 위치를 외우는 일이 아니었을지 그려본다. 또 벽지와 바닥이 비교적 단촐하고 가구가 없는 점이 눈에 띈다. 검소함을 덕으로 여기던 유교의 나라 조선의 정신이 담겼나 보다. 안전을 이유로 방 안에 가구도 들이지 않았다고 하니 조선이 얼마나 왕과 왕비의 옥체를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신분의 거리가 멀다 한들, 이렇게 가까이에서 생활하다 보면 어쩐지 신분을 초월한 정을 상상하게 된다. 창문 너머로 순정효황후의 생활을 함께하며 우정을 나눈 궁녀가 한 명쯤 있었으리라.

1910년 국권침탈과 함께 그들이 생활하던 모습 그대로 대한제국의 시간이 멈춰버렸지만, 시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는 오히려 멈춘 그 모습들을 통해 조선의 마지막 날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 글이나 그림으로 남겨진 기록들과는 또 다른 생동감 있는 공간의 기록이다. 가장 한국적인 공간인 궁궐에서, 곳곳에 보이는 근대 문물들과 그 밑에 깔린 오래된 조선의 배경들이 역사의 흔적으로 생생히 전해진다. 어쩌면 지금 이곳을 둘러보는 나조차도 대조전 시간에 손길 하나 더한다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쑥스러워졌다.
[월간한옥 17호] 플레이스_창덕궁 대조전 중 일부 발췌
왕의 흔적을 살피다 < 플레이스_창덕궁 대조전>
글 박예은 / 사진 강민정
조선 궁궐 안 사람들은 창덕궁 안의 서양식 가구들이 후세 우리에게 '대조전의 옛 모습'으로 소개 될 것을 알았을까.
태종 5년부터 500여 년간 조선의 왕과 왕비가 바뀌며, 그들의 생활공간이었던 대조전은 아마도 주인의 취향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겠다. 또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동안 발생한 화재는 대조전 건물의 굵직한 변화를 주게 되었다. 옛 모습의 옛 모습까지 볼 수는 없어 아쉬움이 들지만, 천장의 샹들리에, 자개로 된 용상과 용무늬 조각 침대 등 조선의 마지막 모습이 그대로 머무른 대조전은 구한 말 왕과 왕비의 일상을 상상하게 했다.
내내 남의 집에 허락 없이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주인을 지목한다면 아마도 조선 마지막 왕비이자 순종의 계비였던 순정효황후가 아닐까 싶다. 특히 대청 왼편 서온돌에 놓여있는 침대를 보며 황후의 마음을 읽어보고 싶었다. 13살 어린 나이에 스무 살 연상의 순종에게 간택되어 대조전에서 대한제국의 멸망과 일제강점기를 겪어낸 순정효황후의 궁중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 윤택영과 숙부 윤덕영 등은 악명 높은 친일파였고, 하루가 멀다고 순종을 괴롭혔다. 아무리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이라 하지만,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검은 속내와 한 나라 국모로서의 지조 사이에서 순정효황후는 몇 날 며칠 잠 못 이루며 갈등했을 것이다. 침대의 낡은 헤짐에서 황후의 뒤척임이 보였다.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시아버지인 고종과 남편 순종은 커피를 즐겨 마셨는데, 이 영향으로 순정효황후도 아침마다 커피와 케이크를 즐겼다. 탁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황후를 떠올려보면 그 모습이 참 재밌다. 당시의 ‘가배’라 불리던 커피는 원두커피였는데, 순정효황후와 2000년대에 조우한다면 따뜻한 라떼 한 잔 함께할 수 있을까. ‘우유 가배’ 라고 소개하면 되겠다. 또 한쪽엔 욕조가 있는 욕실과 이발실도 있었는데, 조선의 궁궐에 근대식 생활 편의 시설이 다양하게 사용됨을 볼 수 있었다. 서양의 문물과 생활을 충분히 즐기던 왕족들의 모습이 색다르다.
대조전에는 왕비의 생활공간 외에도 눈에 띄는 공간들이 있었다. 화려한 나전칠기로 된 용상이 있는 대청을 중심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인 서온돌과 왕의 공간인 동온돌은 여러 개의 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궁녀들이 왕과 왕비를 보좌하기 위해 항시 대기하며 생활하던 공간이다. 겹겹이 쌓인 방들과 복잡한 복도를 지나다녀보니 방이 집 같고 복도가 골목 같았다. 작은 마을처럼 보였다. 옆집 앞집마냥 옹기종기 붙어있는 방들에서 생활하던 궁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궁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된 궁녀들의 첫 업무는 ‘몇 번째 방, 몇 번째 복도’ 하며 그 위치를 외우는 일이 아니었을지 그려본다. 또 벽지와 바닥이 비교적 단촐하고 가구가 없는 점이 눈에 띈다. 검소함을 덕으로 여기던 유교의 나라 조선의 정신이 담겼나 보다. 안전을 이유로 방 안에 가구도 들이지 않았다고 하니 조선이 얼마나 왕과 왕비의 옥체를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신분의 거리가 멀다 한들, 이렇게 가까이에서 생활하다 보면 어쩐지 신분을 초월한 정을 상상하게 된다. 창문 너머로 순정효황후의 생활을 함께하며 우정을 나눈 궁녀가 한 명쯤 있었으리라.
1910년 국권침탈과 함께 그들이 생활하던 모습 그대로 대한제국의 시간이 멈춰버렸지만, 시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는 오히려 멈춘 그 모습들을 통해 조선의 마지막 날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 글이나 그림으로 남겨진 기록들과는 또 다른 생동감 있는 공간의 기록이다. 가장 한국적인 공간인 궁궐에서, 곳곳에 보이는 근대 문물들과 그 밑에 깔린 오래된 조선의 배경들이 역사의 흔적으로 생생히 전해진다. 어쩌면 지금 이곳을 둘러보는 나조차도 대조전 시간에 손길 하나 더한다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쑥스러워졌다.
[월간한옥 17호] 플레이스_창덕궁 대조전 중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