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한옥 레터 #08] 영감으로 가득찬 어느 초여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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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장보현

사진_김진호

영감으로 가득 찬 어느 초여름 날


《지금 여기에 잘 살고 있습니다》의 저자 장보현 작가는 9년째 한옥에서 살고 있다. 일과 일상이 공존하는 그의 한옥 공간은 미래의 길잡이이자 자화상이다.


도심 속 한가운데 작은 한옥에서 어느덧 아홉 번의 여름을 맞이하는 중이다. 아침 햇살이 안채를 비춰올 무렵이면 고양이 미셸은 옥상정원을 향해 놓인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 유연한 몸짓으로 교태를 부리며 귀여운 ‘야옹’소리를 낸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미셸과 함께 옥상에 올라 여름의 문턱에서 싱그럽게 뻗어나가는 허브 잎사귀를 어루만진다. 달과 별의 행로에 조금씩 고개를 비튼 꽃대가 미풍에 나부낀다. 초여름의 향기가 손가락 틈새로 스민다.

그 사이 주방에선 예쁘게 부풀어 오른 빵 반죽이 뜨거운 오븐에서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그라인더 사이로 곱게 흘러내리는 은은한 커피 향은 선잠을 깨운다. 신선한 제철 야채를 볶아 버터와 우유에 끓인 수프는 달콤한 연기를 내뿜으며 주방에 온기를 더한다. 마침 상온에서 푹 익은 아보카도가 적당히 무른 듯하고 여름의 문턱에서 탐스럽게 영근 제철 과일은 완벽한 피사체로써 식탁 한 편에 정물화 마냥 놓여 있다.


어느새 태양이 이만치 물러와 나의 작은 부엌을 비춘다. 정성스럽게 요리한 식사를 가지런히 그릇에 담고 크레마가 흘러넘치는 커피도 내린다. 오븐에서 갓 구워 나온 고소한 빵조각과 따스한 수프가 식탁 위로 모락모락 김을 피운다. 그 사이, 흘러가버리면 그만인 순간을 조금만 더 유예하고자 매일같이 펼쳐지는 일상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프레임 속에 차곡차곡 담는다.

식사를 마친 뒤, 집안의 문을 활짝 열고 청소가 끝나면 옥상에서 따온 허브 잎을 띄워 오후 동안 마실 물병을 채운다. 하루의 태양이 기역 자 한옥을 부채꼴로 순회하다 마침내 붉은 오렌지빛으로 꼬리가 길어진 잔광을 토해낼 때까지 줄곧 글을 쓴다. 영감의 천사는 늘 곁에 머문다. 고양이의 도톰한 발등 위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꼬리 끝에, 태양의 복사열을 머금은 털 사이에, 동공과 수축을 반복하는 투명한 동공 너머에.


마침내 해 질 녘이 다가오면 서산에 걸린 태양의 잔광이 산책을 재촉한다. 활짝 열린 길목 사이로 순간을 감각하며 하루 동안 써 내려간 활자를 정리한다. 여름의 문턱에서 온갖 세태의 향기가 피부로 와닿는다. 여름의 문턱에서, 온습한 대기 속에서 올곧게 내리쬐는 태양광을 쉴 새 없이 튕겨내며 농후한 초록빛을 머금은 풍경이 새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