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으로 해체한 건축과 도시 #6] 환구단 지역의 황궁우(皇穹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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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 지역의 황궁우(皇穹宇)

이관직


조선의 아픈 역사가 모여 있는 곳


을지로 입구에서 시청 광장으로 나오기 전에 남측으로 롯데 호텔과 프레지던트 호텔 사이에 좁은 골목이 있다. 골목 끝을 바라보면 여러 단의 계단이 조성된 언덕이 있고 그 위에 여러 단의 한옥풍 기와지붕 건물이 힐긋 보인다. 골목을 따라 걷는다. 가파른 화강석 계단을 오른다. 오른쪽에 한옥 정자형 건물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품격 있는 3단 지붕을 가진 팔각정 모양의 탑형 건물을 만난다. 


중구 소공동(小公洞)이다. 어려서 만화나 문고판으로 읽었을 것 같은 프랜시스 버넷 소설의 소공자 소공녀가 생각나는 지명이다. 소공동이란 이름의 유래는 조선 태종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후궁과 빈첩을 두었던 태종은 본부인 원경왕후 민씨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다. 그 가운데 둘째 딸인 경정공주(慶貞公主)가 혼인적령기가 되자 명과의 통혼을 피해서 아직 상중(喪中)이던 조준(趙浚)의 아들 조대림(趙大臨)과 부랴부랴 혼인을 시킨 뒤 지금의 웨스턴 조선호텔 자리에 집을 마련해주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작은 공주골', 한자로는 '소공주동(小公主洞)'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 일컬었는데, 소공동(小公洞)이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선조 16년(1583)에 이곳에 다시 궁을 화려하게 지었다. 선조의 셋째 아들 의안군(義安君)이 살 집을 마련해 주었다. 의안군이 일찍 죽은 뒤 집은 비어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서울은 왜적의 손에 넘어갔고, 왜적은 의안군의 집을 자신들의 진지로 사용했다.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하면서,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 군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에 머물기 도 했다고 한다. 1593년 10월 선조가 서북 피란지에서 환도한 뒤에는 자주 이곳에 나가 명나라 장수와 관원들을 접견하고 요담했다. 여기에서 유래되어 왕의 거소(居所)를 의미하는 별궁, 즉 남별궁의 이름이 붙여지게 됐다. 1840년대에 김정호가 만든 목판 수선전도에도 남별궁의 구역이 그려져 있다.


조선 말, 나라는 외세의 태풍 소용돌이 속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 비참하게 몰락하던 시절. 조정은 개화파와 수구파, 친일파와 친청파, 자주파와 사대파로 갈라져 있다.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된 1876년 강화도조약, 1882년 임오군란. 청의 개입으로 삼일천하가 된 1884년 친일 개화파의 갑신정변 실패, 1894년 봄 동학농민운동을 기화로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아산과 인천에 몰려오는 가운데 친일 세력에 의해 주도된 갑오개혁. 명성황후 암살의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1896년 소란한 정국 속에 친러파의 비호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 국정은 러시아의 수중에 있고 나라의 수많은 이권은 열강에 빼앗기고 혼돈과 혼돈이 거듭됐다. 


1897년 2월, 치외법권 지역인 러시아 공사관의 망명을 끝내고 경운궁으로 이어(移御) 한다. 열강 세력의 이권 침탈을 비롯한 국가의 자주성이 크게 위협받자 자주성을 띤 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백성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 갔다. 독립협회와 수구파의 자주독립 주장에 힘입어 고종은 자주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국가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제후국이 아니라 황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해 8월 17일 광무(光武)란 연호를 쓰기 시작하고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했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정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 후 우리나라 국호 기원이 된 대한제국에서 대한은 옛 조선 곧 삼한(三韓)의 영광을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황제국으로서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원구단(園丘團)을 소공동 남별궁 자리에 만들었다. 10월 12일 원구단에서 상제(上帝)님께 천제를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즉위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각국은 대한제국을 직접으로, 간접으로 승인했다. 그중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는 국가 원수가 승인하고 축하하였으며 영국, 미국, 독일도 간접으로 승인하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당시 열강 대부분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제위에 오른 고종은 그 직후인 11월 12일 미루었던 명성황후의 국장(國葬)을 치렀으며, 과거에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의 상징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 건립에 추진하여 11월 20일에 완공했다.


환구단은 화강암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는 금색으로 칠한 원추형의 지붕이었다. 환구단은 하늘과 땅, 별과 천지 만물에 깃든 신의 신위를 모시고 주요한 절기에 제천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제단이다. 환구단 건립 2년 뒤 1899년, 북쪽에 화강암 기단을 쌓고 3층 8각의 탑형의 목조 건축물 황궁우(皇穹宇)를 건립하여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신들의 신위판을 모셨다. 황궁우의 내부는 층의 바닥이 없는 통층 공간으로 되어 있고 천정 중심에 용의 발톱이 일곱 개인 칠조룡(일부자료는 팔조룡)을 새겼다. 이는 황제를 상징한다.(명대와 청대의 기록에는 중국의 황제는 5조룡, 제후국 중 조선과 남지 않은 4조룡, 일본과 유구 등은 3조룡 등으로 규정했던 내용이 있다 한다. 당시 대부분 왕을 상징하는 용의 그림이나 조각은 4조룡이 많다) 


1902년 광무 6년, 황궁우 앞에 단을 만들고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며 돌로 된 북 세 개의 석고를 세웠다. 세 개의 석고는 제천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며 세 개의 석고 둘레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무늬가 있다. 환구단의 설계와 공사는 당시 도편수였던 심의석(1854~1924년)이 했다고 전해진다. 심의석은 미국 감리고 선교사들과 교류를 통해서 서양 건축을 배우게 됐다. 그가 참여하거나 설계한 개화기 건축물은 1887년 배재학당을 비롯하여 1897년 독립문과 파고다 공원 내 팔각정, 1899년 정동제일교회, 광화문 소재 기념비각(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 (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라는 긴 이름으로 고종의 왕위 40년에 기로소에 오르게 된 것을 기념하는 비각), 1903년 손탁호텔, 1909년 덕수궁 석조전 등이다. 그가 참여한 건축물의 일부는 철거되었지만 대부분 지금까지 남아있다.




대한제국의 이름과 뜻은 환구단과 함께 역사적 좌절을 겪는다. 1905년 굴욕의 을사조약 후,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이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됐다. 치욕의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1897년 대한제국의 선언으로 실낱같은 희망으로 나라를 다시 세우려 했던 의지가 완전하게 좌절됐다. 국권은 피탈되고 식민지,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환구단은 1911년 조선총독부 관할이 되었고 황궁우와 재실 일부만 남기고 철거됐다. 1912년에 착공해서 1914년이 경성철도 호텔이 그 자리에 개관했다. 대한제국의 상징이 일본의 조선 식민지의 상징이 됐다. 환구단은 창경궁이 동물원으로 훼손되면서 창경원이 되었듯이 1918년 철도 호텔에 조성된 장미원(薔薇園) 로즈가든은 일반인에게 개방되면서 서양풍의 개화 장소로 인식됐다. 해방 후에도 수난은 계속된다. 철도 호텔은 1958년 화재로 일부 소실되고 복구된 후, 1967년 미국 항공사가 인수하여 신축해서 재개관했다. 



1979년 외국인 투자가가 웨스틴조선호텔로 변경했고 1983년에 삼성그룹이 투자하고 1995년 6월 삼성 계열인 신세계가 전체를 인수했다. 옛 환구단의 중심에 자리한 호텔은 건축 배치와 축의 사용이 일부러 놓은 듯 안타까울 정도로 일제에 의해서 철거된 환구단의 위치와 일치한다. 환구단 정문은 원래 황궁우의 남쪽 지금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 변에 위치했다. 1967년 철거된 이후 소재를 알지 못하다가 2007년 우이동 그린파크호텔 재개발 과정에서 백운문이라는 현판을 걸고 사용하던 정문이 환구단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후 정문의 이전과 복원을 논의하여 재능교육빌딩 옆 현재의 위치로 확정, 복원했다. 많은 역사상의 나라가 지배와 통치를 위해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나라는 백성을 위해 세운 나라라는 기본 이념을 명분으로 갖는다. 국민이 없이 땅만 있는 나라가 있을까. 국민이 나라이고 나라가 국민이다. 배불리 먹고 평안한 나라를 위해 하늘에 빌고, 땅과 곡식의 신에 빌고, 조상에 빈다. 숭배와 기원은 제사를 지내는 형식을 갖는다. 하늘을 숭배하고 비는 일은 제천(祭天)이고 땅의 신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에 비는 곳은 사직단(社稷壇)이다. 




조상으로서 역대의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신 곳을 종묘(宗廟)라 한다. 고대 중국의 주나라 법률 기술서인 주례고 공기의 좌묘우사 원칙에 따라 조선도 경복궁을 기준으로 사직단은 왼쪽에, 종묘는 오른쪽에 배치했다. 고려시대 이후 우리나라는 중국 명나라 황제국 아래 제후국이었다. 황제국만 하늘에 제천을 할 수 있는 그들의 법도에 따라 제후국인 조선은 사직과 종묘만 모실 수 있었다. 하늘의 상징은 원형이고 땅의 상징은 방형이다. 제사를 지내는 단의 형태도 그 상징을 따라 원과 사각형이 선택된다. 우리나라는 제천의식을 할 수 있는 원형의 제단이 없었다. 


최초의 원형 제단이 대한제국의 원구단이다. 황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스스로 칭하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을 만들어 제를 올리고 즉위식을 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은 잠시 13년 동안 지속했다. 그리고 35년 어두운 빼앗긴 시절이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그 국가의 이름과 정신이 그곳에서 발아하고 모두의 마음에 정신에 각인되어 대한이라는 새로운 나라의 이름으로 살아나게 된 것일 것이다. 서울에는 대한제국 시절 의미 있는 100여 년 전 역사를 간직한 두 개의 건축물이 어렵게 남아있다. 소공동 호텔 고층 건축물 사이에 남은 황궁우와 이리저리 개발의 틈에 빈 장소를 찾아 옮겨 다닌 독립문이다.



이 년 전쯤에 어느 신부님이 전화를 주셨다. 은평 한옥마을을 답사 중에 한옥을 설계하는 건축가로서 소개를 받아 전화한다고. 이탈리아에서 공부하셨다는데 바실리카 양식의 유럽 성당 건축에 대해 말씀하면서 우리나라의 전통형식의 건축물이 가능한가를 물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한옥 건축물로 성당을 지으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했다. 자신에게 보인 성당의 기본적인 형태가 환구단이었다고 했다. 나중에 자료를 찾으니 환구단 철거 후 남은 황궁우 건물이었다. 적당한 부지를 찾지 못해서 그 한옥 성당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되지는 못했다. 종교 건축물은 두 종류로 나뉜다. 신이 거하는 신전과 예배를 위해 사람이 모이는 회당이다. 신을 모시던 그리스 로마의 신전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공인 후, 사람이 모이는 바실리카 교회당으로 변화였다. 이슬람의 모스크는 예배를 위한 회당에서 출발했고, 불교의 대웅전은 부처님을 모시는 일종의 신전이라 할 수 있다. 황궁우 건물은 팔각형의 평면으로 목조탑에 가깝다. 황궁우의 건축적 구성을 이해하기 위해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 포털의 도면 자료를 다시 그리고 분석했다. 



평면은 동심원 위에 놓인 정팔각형 모서리에 세워진 8개씩 기둥의 3열로 구성된다. 1층의 기둥은 최단의 원에, 2층은 조금 안쪽에, 3층의 기둥 열은 더 안쪽에 배열된다. 전체 건축물의 규모를 이해하기 위해 치수를 알아본다. 1층 기둥 열은 직경이 15m 열에 배치된다. 2층의 기둥은 직경 11.8m 열에 배치되고 3층의 기둥은 직경은 8m 원에 배치된다. 1층의 8개 기둥 사이의 도리 간격은 약 5.7m이고, 팔각형 꼭짓점 주기둥 양옆에 한 개의 보조 기둥이 서 있다. 주기둥과 보조 기둥의 간격은 약 98cm이다. 2층의 기둥 간에 설치된 도리 간격은 약 4.5m이고 3층의 도리 간격은 약 3m이다. 3층의 기둥은 기초를 제외하고 약 8m 정도 높이다. 화강석 기초 45cm 높이와 도리에서 중도리까지 높이 약 25cm를 더해서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 즉 천정고는 약 9m가 된다. 부피로 생각해서 2층은 도리 높이 4.2m에 직경 11.8m의 공간이고, 1,2, 3층이 뚫린 통층의 가운데 공간은 천정고 9m, 직경 8m 원 상에 서 있는 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로 8 : 세로 9의 비율의 원통 탑 내부처럼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전(殿)이나 당(堂) 건축물로는 매우 특이한 공간이다. 한 공간이지만 3층 열 기둥을 기준으로 2층 부분은 단면에서 바닥이 40cm 낮아져 있고 1층 열 부분은 2층 열 보다 50cm 낮게 되어 있다. 2층 기둥 열을 기준으로 내외부가 구분된다. 1층 기둥과 2층 기둥의 사이는 외부 회랑이 된다. 3층 기둥 위의 지붕의 구조는 길이 약 7.4m 4개의 대들보가 우물 정(井)로 기둥을 연결하여 걸쳐져 있고 그 상부에 8각형의 구성된 중도리를 받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황궁우는 직경 약 20m의 원에 접하는 팔각형의 화강석으로 싸인 기단부에 올라서 있다. 황궁우의 입면과 단면을 구해진 자료를 토대로 다시 그려보았다. 도면을 통해 살펴보면 올라갈수록 체감되는 비율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건물을 무겁지 않게 보이도록 2m에 가까운 길이의 처마가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2층과 3층의 지붕은 서까래 위에 부연이 덧붙여져 내밀고 있는 겹처마이고 1층의 지붕은 오히려 가볍게 각형의 서까래를 홑처마로 처리했다.



도심 속 소공동에 있는 황궁우는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군 속에 왜소해 보인다. 그렇지만 찬찬히 보면 주변에 이삼십 층의 현대식 빌딩들 속에서 아직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존재감을 가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중요한 의미의 국가사적 사건을 간직한 건축물이면서 아름다운 구조미를 간직하고 있다. 종교적일 정도의 심오하고 독특한 내부 공간과 완결된 조형성을 가진 우리의 빼어난 유산이다. 유산으로서 문화를 생각하고 반복되는 역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중요하다. 아름다운 것을 지킬 수 있는 용기가 중요하다. 아름다운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자존심이 중요하다. 환구단의 허물어진 흔적을 본다. 아름다운 황궁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