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한옥 레터 #19] 운현궁의 시간에 말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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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과 운현궁 양관 ⓒHanok_magazine ⓒAPC


얼마 전 종영 된 드라마 ‘그 해 우리는’에서 일러스트레이터 인 남자 주인공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모습이 좋아 사람이 아닌 건물만을 그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는 것은 사람뿐이 아닙니다. 건물 역시 색이 옅어지고, 철물에 녹이 슬고, 나무가 바래져 갑니다.

 

안국역에서 비교적 한산한 거리, 4번 출구 앞에는 운현궁이 있습니다. 파란만장한 시간을 겪은 운현궁과 양관은 조선 말에서 일제강점기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대부의 집에서 조선 궁궐로, 일제의 감시 공간에서 독립운동 집무실로 역사의 부름에 따라 변화된 목적과 주인을 맞이하였습니다.

 

월간한옥 N.30에서는 운현궁과 양관의 역사적 이야기와 건축적 측면으로 바라 본 양관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여전히 일월日月이 흐르고 있는 운현궁의 오랜 이야기를 읽으며 노안당 안뜰에 필 매화꽃을 기다려보는건 어떨까요.



운현궁 노락당 전경 / 출처: 문화재청


ㆍ사대부의 집에서 궁궐이 된 공간, 운현궁  


운현궁은 고종이 11세까지 살았던 집이고, 왕이 된 후 고종의 아버지로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다.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고종 즉위 후,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府大夫人)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이다.



            이하응 (흥선대원군)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운현궁은 정식 궁궐보다 규모는 적지만,  임금 이외에 이런 규모의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궁궐보다 더욱 권세를 누렸던 공간으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진다. 당시 대원군이 살던 운현궁에는 출세를 하고자 하는 손님들이 많았으며 창덕궁을 쉽게 드나들도록 고종 전용 경근문과 흥선대원군을 위한 공근문이 있었다고 한다.


운현궁과 양관 배치도 스케치 (그림. 이관직)  ⓒHanok_magazine ⓒAPC


 

운현궁은 대원군의 권력과 함께 규모의 크기가 변하였다. 고종이 즉위 후 신·증축 공사를 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위 담장 길이가 수리(數理)나 되고 4개의 대문으로 웅장함을 갖추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청에 구금당하고 있는 동안 관리유지가 힘들었고 한일강제병합 후 몰수되었다가 이후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졌다.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현재는 서울시 소유가 되었다.



운현궁 양관 ⓒHanok_magazine ⓒAPC


ㆍ근현대 역사의 흔적, 네오바로크 풍의 조선 궁가  


운현궁 양관은 1912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조선의 왕족을 회유하고 감시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에게 지어준 것이다.  양관 건물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네오 바로크풍으로 지어졌으며, 설계자를 ‘가타야마 도오쿠마(片山東熊)’로 추정하고 있다. 양관은 벽돌조 2층이며 석재와 목재도 겸용했다. 전체면적은 약 284평이다. 건물의 의장은 두개씩 붙은 아치로 장식된 4개의 발코니가 있고, 본 벽은 안으로 물러나 있어서 입체감이 돋보인다.


운현궁 양관 ⓒHanok_magazine ⓒAPC


이준용 사망 후 운현궁 양관은 조선의 마지막 왕자인 이우가 머물었으며 해방 직후 1946년경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이 후  1948년 11월 30일 덕성학원이 매입하여 현재까지 소유하고 있으며, 1998년까지 강의실로 사용하였다. 현재  평생교육원 사무처로 사용하고 있다. 


일제가 왕족을 회유하기 위해 지어졌지만, 조선 마지막 왕자가 머물고, 백범 김구선생의 독립운동 집무실로 사용되었던 역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아픈 과거와 그와 중첩된 공간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 



남아있는 유물을 살피다 보면 어떤 시절, 영광의 역사도 있고 치욕의 역사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들이 언제나 혼재되어 있으며, 과거의 것들에 대해 우리는 현실적인 어떤 조치를 하게 된다. 존치를 결정하기도 하고, 흔적을 찾아 복원하기도 한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모두에게 찬양받지만,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아름다운 것에 대해 보편적인 동의는 쉽지 않다. 정치적, 경제적 판단 속에, 또 학술적 판단에서도 어렵다.

운현궁과 운현궁 양관은 세워지고 이름 붙여진 이후에도 끊임없이 부서지고, 증축되고, 덧대어지고, 이전되어 왔다. 그래도 많은 노력에 의해 지금까지 이렇게 남아있다. 남아있다는 것, 힘듦의 충돌 속에 버티어 온 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월간한옥 No.30 드로잉으로 해체한 건축과 도시 / 운현궁과 양관 (글,그림_이관직) 중에서


<드로잉으로 해체한 건축과 도시 / 운현궁과 양관>, <근대건축 / 네오바로크풍의 조선궁가>를 통해 건축과 역사의 관점으로 바라본 운현궁 양관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