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한옥 레터 #43] 색을 통해 전해지는 한국적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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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자연색에서 오는 색의 심상(心象)  

창덕궁 대조전 / 사진 월간한옥


전통색이란 한 지역에서 역사성을 지니고 발전한 색을 뜻한다. 지역색과 전통색을 형성하는 단계에서는 인간이 색을 지각하는 과정에서 내재된 문화와 생활 습성에 영향을 받는다.

(프랭크 H. 만케, 최승화ㆍ이명순 역, 『색채 환경 그리고 인간의 반응』, 국제, 1998)


전통색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지역적 문화와 자연환경입니다. 현대는 서구화, 디지털화된 색의 명칭 사용이 보편화되어 색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과거부터 오랫동안 사용한 토속적인 색이름을 살펴보면 한국의 전통색이 가진, 자연과 삶에서 비롯되는 색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청자 상감 동화 포도 동자 무늬 조롱박 모양 주전자와 받침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표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한국의 고유한 표현으로 '누렇다'가 있습니다. 사전적으로는 '황금이나 익은 벼의 색'으로 정의하며 한자로는 '누를 황(黃)'이 '누렇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누렇다'의 어근인 '눌-'은 흙과 땅을 의미합니다. '천지현황(天地玄黃, 하늘은 검고이며 땅은 황색이다)'이라는 말처럼 동양에서는 하늘은 끝없이 아득하기에 검을 현(玄), 땅은 누를 황(黃)을 사용하며 황색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누렇다는 색은 땅의 색을 표현한 것이며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는 '익은 벼 색'으로 인식되고 사용된 것입니다. 이외에도 노란색의 한 가지인 아황색(鵝黃色)은 거위의 부리, 발의 색과 광택, 혹은 새끼 거위의 색을, 적색의 한 가지인 단색(丹色)은 우물(井)에 돌이 있는 모양(丹)으로 깊은 곳에 있는 붉은 돌을 말합니다.


자연으로부터 인식된 색은 그 자연물을 따라 여러 관념적인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포도색은 잘 익은 포도의 색을 뜻하며 주렁주렁 맺힌 형태에서 결실과 자손 번창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포도동자문을 대표적으로 우리나라 전통 문양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 / 사진 월간한옥


옛 그림은 먹뿐만 아니라 다양한 안료를 사용하여 색을 표현했습니다. 건축의 단청, 석채의 안료는 흙이나 광물에서 채취하였고, 한복의 실과 원단의 염색, 맑은 표현에는 동식물을 통해 염료를 채취하였습니다.


광물성 안료는 깊은 무게감이 느껴지며, 식물성 안료는 맑고 투명한 느낌을 전달합니다. 특히 식물은 주변에서 구하기가 쉬웠고, 재배가 가능하여 안정적인 확보를 통해 다채로운 색상의 추출이 되었습니다.


식물의 잎, 줄기, 열매 등은 각각의 독특한 색소를 가지고 있어 각각의 염료 추출법이 상이합니다. 물의 온도, 산성과 알카리 등 재료마다 다른 염료추출이 필요하였고, 옛사람들은 다홍색 염색은 오미자나 매실에, 쪽빛은 녹두 물에, 초록색은 식초를 타서 각 색상마다의 방법을 통해 변색을 막았습니다.


동남아시아의 강물을 보면 올해의 유행하는 색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최근 화학 염색 공정으로 인한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됩니다. 많은 공정을 거쳐야 하는, 현대의 관점으로는 다소 비효율적인 천연재료의 염색이지만 자연을 닮아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선조들의 지혜가 드러납니다.


일월오봉도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우리는 색을 자연으로부터 인식하여 다시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자연에서 재료를 찾아 다채로운 색을 염료, 물감 등으로 만들어 칠했습니다. 그렇게 표현된 인간의 색은 자연과의 호흡으로부터 탄생하여 병풍, 고화 등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모 미술관의 병풍 전시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거의 미술품에서 느껴지는 울림은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존재했던 우리의 색이 가진 힘에서 오는 것 아닐까요.



ㆍ김지민 쪽 염색가, 파랑을 찾는 매일의 여정  


사진 월간한옥


쪽 염색 작가 김지민은 금속재료학을 전공하고 철강회사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 취미로 천연 염색을 접하게 되었고, 그중 인디고라 부르는 쪽 염색에 푹 빠지게 되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인디고 블루 말고는 별로 흥미가 안생긴다.”는 그는 ‘한국의 인디고’를 찾고자 본격적으로 염색 작가로의 길을 걷기 전 색(色)도락 여행을 떠났다.

사진 월간한옥


국내뿐 아니라 일본의 도쿠시마, 미국의 브루클린까지 색을 찾아나선 여정이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그의 뇌리에 남은 장면은 작가들의 블루 핸즈(Blue Hands)였다. 파랗게 물든 손톱과 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더욱 기억에 남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손에 대해 아주 큰 자부심이 있더군요. 펍에서 맥주를 마실 때 블루핸즈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는데, 그런 자신감이 부러웠고, 저 역시 그런 손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오랜 시간 조금씩 물든 작가들의 손처럼, 쪽염색은 색을 탐색하듯 지난한 과정과 시간을 보내야 좋은 색을 낳는다. 그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는 것, 그 점이 전통 염색의 본질이라 하는 그의 손도 역시 파란빛이 감돌고 있다. 


사진 월간한옥


그는 자신의 작업을 ‘지민 블루’라고 부른다. 쪽 염색은 같은 인디고라 하더라도 수확의 과정부터, 니람(침전물)을 만들고 보관하는 방식, 보관 기간 등에 따라 모두 다른 색을 내기 때문에 그만의 색을 구현할 수 있고 이것이 작가의 정체성을 표현해 주기도 한다. 다양한 블루의 스펙트럼 속에서 진하면서도 차분한 색감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전 과정을 개발하고 이를 체계화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모든 과정의 첫 시작은 작업실 앞마당 작은 비닐하우스 속에 있다. 하우스 안에는 쪽 모종이 자라고 있는데, 매해 봄 씨앗을 뿌리고 5월이면 봄밭에 옮겨 심는다.


밭에서 자라는 쪽은 여름에 비로소 수확을 한다. 수확된 쪽에서 염료를 추출하는데, 그 진행 방식도 매우 세심하다. 우선 쪽을 수확한 후 불용성인 인디고가 수용성이 되도록 햇빛이나 열을 가한다. 통에 물을 담근 후 대기열로 인해 가수분해를 시켜주는 것인데 작가마다 잎만 넣기도 하고, 줄기를 함께 넣기도 하는 등 각자의 방식이 있다. 그 후에 조갯가루, 막걸리 효소 등의 재료를 넣어서 산소를 주입해 주는데, 이 과정을 통해 니람(침전물)이 만들어진다. 발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염료의 전 단계로 본다. 이처럼 발효한 쪽물로 염색을 하면 우리가 잘 아는 진한 파랑의 ‘쪽빛’의 색깔이 난다.

 

사진 월간한옥 


김지민 작가는 “도자에서도 연한 옥빛의 청자가 잡티나 오염도가 더 잘 보이듯이 더욱 연한 쪽 염색을 하는 것은 기술의 측면에서 더 높은 스킬을 요한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발효가 되지 않은 염료이기 때문에 색이 더 잘 휘발되기도 하는데, 그는 이런 연한 색도 균등하게 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가 좋아하는 색은 ‘균등한 색’입니다. 진한 파랑도, 연한 하늘빛도 좋아하지만 쪽 염색을 하는 작업가로서 가장 좋은 색, 구현하고 싶은 색은 ‘균등한 색’이에요.” 그는 수공예라는 이유로 약속한 색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특히 자신의 색을 찾는 이들에게 항상 변함없는 파랑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 월간한옥 


“농사짓는 분들은 영농 일지를 쓰죠. 저도 매일 일지를 쓰고 있어요. 발효 후 시간에 따라, 날씨와 온도에 따라 어떤 색이 나오는지 기록하고 있어요.” 그가 지금까지 써온 일지만도 두꺼운 노트로 여러 권이 된다.


그는 옷뿐만 아니라 신발, 스케이트보드, 소반, 화문석 등 다양한 대상에 쪽 염색을 한다. 소재에서 느껴지는 이국적 느낌은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현재를 이해하고 변화하고 있는 ‘요즘 전통’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가구나 나무에 관심이 많은 편이에요. 그래서 스케이트보드도 염색해 봤는데 나뭇결에 염색되는 멋이 맘에 들더라고요.”


“파란색이라고 해서 ‘지민블루’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살아왔고, 부모님께서 작업실로 내어준 이 공간이 있기 때문에 염색을 할 수 있고, 또 많은 주변의 도움이 있기 때문에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모든 복합적인 환경이 ‘지민블루’를 만드는 것 같아요.”


‘한국적’이라고 해서 역사와 전통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토양, 물, 자연 그리고 그것들을 보고 느끼며 살아온 사람들. 이들이 표현하는 지금의 파랑이 한국의 파랑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김지민 작가와 같은 이들이 연구와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면 한국의 파랑은 계속해서 깊어지고, 더욱 다채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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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Publisher

박경철 Kyoungcheol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