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화당 책 박물관 ⓒ월간한옥 / 강민정
ㆍ2022년, 종이책을 만들며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전자책으로 인해 꾸준히 감소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종이책은 꽤 선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보다 규모나 성장세가 줄어들었을지라도 종이책은 질감, 향기 등 고유의 물성이 가진 매력과 데이터 유실, 해킹 등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실물이 가진 특성으로 여전히 선호되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에 콘텐츠 소비의 중심은 웹과 디지털 플랫폼이 되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에 '책'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실제로 읽는 사람은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입니다.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종이책은 여전히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갖고, 손에 쥐고 읽히도록 분주히 펴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선전이라기 보다는 고군분투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월간한옥은 1954년부터 70여 년간 개최되고 있는 '국제 도서전'에 2018년부터 꾸준히 참여하며 독자, 출판사 등 국내외 출판계를 이루는 여러 사람과 교류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종이책이 있기에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반갑게도 최근 몇 년간은 소형 서점과 독립출판물 시장의 규모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새로운 행사도 여럿 생겨났습니다. 최근에는 독립출판물 페어인 '언리미티드 에디션'과 '퍼블리셔스 테이블'이 개최되었습니다. 책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친근하고 따뜻한 공기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곧 한 해의 마지막 달을 맞이합니다. 내년에도 책을 계기로 많은 이들과 좋은 만남이 있기를 바랍니다. 월간한옥을 살펴봐 주시는 모든 분들은 한국의 전통과 문화뿐만 아니라 글, 책이라는 물성에도 각자가 품고 있는 애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애정에 감사드리며 좋은 책을 오랫동안 만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열화당 책 박물관 ⓒ월간한옥 / 강민정
ㆍ인쇄와 제본
이제는 500g 내외의 얇고 가벼운 전자 기기를 들고 실시간으로 간격과 레이아웃을 조정하며 편한 방식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또 그 안에는 수십권, 수백권의 책을 담을 수도 있죠. 동시에 종이책이 가진 넘기는 느낌이나 질감, 소리까지 담으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최첨단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전기 하나 없이 온전히 수동의 매커니즘으로 읽는 두껍고 무거운 종이책 또한 최첨단으로 점철된 인쇄 기술 못지않게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인쇄와 제본 방식이 있습니다. 원고와 사진이 재료라면 디자인은 요리를 하기 위해 알맞은 크기와 형태로 재료를 손질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인쇄와 제본은 이를 먹을 수 있는,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조리해서 담아내는 것입니다. 책으로 존재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죠.
책에는 원고와 사진, 활자와 배치 등에 대한 고민 외에도 많은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만 비교적 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잘 디자인 된 팩 음료수 디자인 같달까요. 내용물은 음료수이지만 우리는 팩 디자인을 보고 제품을 선택하죠. 이처럼 책 제작에도 종이의 무게인 평량, 표면의 질감, 거친 정도를 나타내는 평활도부터 디지털, 옵셋 등의 인쇄 방식과 중철, 사철, 양장 등 책을 묶어 내는 제본 방식까지 많은 고민이 존재하며 좀 더 정확하고 다채로운 표현을 위해 수백 권의 책에 수작업을 곁들이기도 합니다. 이런 선택들이 모여 종이를 펼쳤을 때 느껴지는 종이의 힘이나 인쇄의 선명도와 망점, 이미지의 가시성과 활자의 가독성, 책의 무게와 손에 쥐었을 때 느낌, 페이지를 넘길 때의 촉감 등이 달라집니다.
유난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유난스러움과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만드는 이들이 있고, 그런 것에 감동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책뿐만 아니라 제조의 곳곳에는 그런 노력이 존재합니다.

승정원일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ㆍ조선의 출판 동향
조선의 출판 동향은 어땠을까요. 조선은 기록의 나라라고도 합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방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수백 권이 넘는 조선의 기록이 등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물은 당연히 종이에 글로 쓰여 묶인 책으로 남겨졌으며 그 외에도 학문과 제도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문치주의를 내세운 조선은 교서관(校書館) 등 출판 관련 기관을 설치하여 유교서적, 역사책, 법전 등도 출판하고 유통하였습니다. 책을 펴내려고 군신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하는 것은 조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죠. 지금으로 치면 임금이 편집장 역할을 맡았는데, 정조는 책을 인쇄할 때 어떤 활자를 쓸지 따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발행된 책은 지금으로 치면 판권지에 해당하는 *간기를 통해 그 출처를 알 수 있었고요.
*간기(刊記): 책의 맨 앞이나 뒤에 출판한 곳, 출판연도 등을 기록한 것
책을 펴내는 것 만큼이나 모으는 일 또한 중요하게 여겨 필요한 책이 있다면 어떻게든 구하곤 했는데 예로 중국으로 가는 사신에게 책을 사 오는 일은 아주 중요한 임무였으며 중국의 서점가를 휩쓸다시피 하며 책을 사가는 조선인들의 모습이 인상 깊어 그것을 묘사한 글귀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은 책은 보관에도 정성을 다했는데요. 해충이나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포쇄를 하였습니다.
*포쇄(曝書): 책에 볕을 쬐고 바람에 쐬는 일
한편 민간 출판은 주로 절에서 불경을 인쇄하거나 서원에서는 문집을 유력 집안에서는 족보 등을 출판하였으며 국가에서 발행한 책은 무료인 경우가 많았으나 수량이 적어 어느 정도 이름난 가문이나 지방 관청까지만 배포가 되었습니다. 가격도 매우 비쌌다고 하는데, 중종 시절 유생들의 필수 서적 중 하나였던 대학과 중용의 가격은 쌀 몇 섬(한 섬이 근 200kg에 해당)과 맞먹었다고 합니다. 민간에서 백성들이 자유롭게 책을 접할 수 있도록 서점이나 도서관을 설립하자는 논의도 있었지만, 당시에 책은 고위 관료와 유력 집안 등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소유의 대상으로, 나누기보다는 집안에 대대로 물려 보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방각본과 소설 위주의 *세책업이 성행했습니다.
*방각본(坊刻本): 영리를 목적으로 민간에서 판각(板刻, 종이책을 낱장으로 목판 위에 두고 글씨를 새겨 목판을 만드는 것=각판)하여 간행한 책
*세책업(貰冊業): 조선 시대 말기에 등장한 도서 대여업으로 일제 강점기까지 존속하였음

열화당 책 박물관 ⓒ월간한옥 / 강민정
ㆍ한글로 된 책을 만든다는 것
한반도에 서려 있는 책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나요. 책에 대한 선호도 선호지만 현실적으로 책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지원책을 통해 출판 산업을 보존, 발전하려고 시도하고 있는데요. 예로 핀란드는 자국어로 된 책의 지속성을 위해 출판사, 저자에 대한 다양한 지원제도와 더불어 도서관을 통해 책을 대여할 때마다 저작권자에게 소정의 저작권료가 지급됩니다.
한국에서도 도서, 출판계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다양한 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도서정가제입니다. 그 실효성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제도의 목적 자체는 중·소규모의 서점 및 출판사가 대형 온라인 서점과 출판사와 경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지식 전달의 기초적인 매개체인 책이 시장주의적 가격경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듯 책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계는 '공간'을 중심으로 발달해왔습니다. 몽골 제국은 빠른 기동력을 가진 말을 통해 넓은 육로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으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 제국은 육로 정비에 힘썼습니다. 통치와 물자, 세금 조달 등에 용이했기 때문이죠. 삼각돛의 등장으로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이후로는 바다가 세력 싸움의 무대였습니다. 다들 우주로 나가려고 하는 이유도 우주가 가진 공간 때문입니다. 다만 아직까진 우주로 향하는 데에 너무 큰 비용과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지만요.
현대의 공간은 디지털과 웹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자원은 '정보'입니다. 전 세계 웹사이트에 존재하는 정보를 구성하는 언어별 비율을 살펴보면 영어가 60.7%로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한국어는 0.6%를 차지하고 있죠. 영어로 존재하는 정보의 양이 월등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결국 현실적으로 영어의 존재가 우등해지겠죠. 한글로 쓰인 책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한글로 존재하는 정보가 많다는 뜻이며 언어가 가진 힘의 바탕이 됩니다.
과거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이 가장 먼저 행했던 것이 모든 한반도에 인쇄 장비를 모두 일본 것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철학과 사상, 기록과 정보가 담기는 인쇄물을 만드는 인쇄기를 바꾸는 것이 문화와 민족성 말살의 시작으로 본 것입니다.
책을 만드는 것에 거창하고 대단한 의의는 없지만 그래도 한글로 된 책을 만든다는 것에는 한글로 새겨진 정보와 지식 공간을 넓혀 언어의 힘을 키우고, 나아가 그것이 민족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에 기여할 거라는 생각입니다.
열화당 책 박물관 ⓒ월간한옥 / 강민정
ㆍ2022년, 종이책을 만들며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전자책으로 인해 꾸준히 감소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종이책은 꽤 선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보다 규모나 성장세가 줄어들었을지라도 종이책은 질감, 향기 등 고유의 물성이 가진 매력과 데이터 유실, 해킹 등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실물이 가진 특성으로 여전히 선호되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에 콘텐츠 소비의 중심은 웹과 디지털 플랫폼이 되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에 '책'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실제로 읽는 사람은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입니다.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종이책은 여전히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갖고, 손에 쥐고 읽히도록 분주히 펴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선전이라기 보다는 고군분투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월간한옥은 1954년부터 70여 년간 개최되고 있는 '국제 도서전'에 2018년부터 꾸준히 참여하며 독자, 출판사 등 국내외 출판계를 이루는 여러 사람과 교류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종이책이 있기에 대면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반갑게도 최근 몇 년간은 소형 서점과 독립출판물 시장의 규모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새로운 행사도 여럿 생겨났습니다. 최근에는 독립출판물 페어인 '언리미티드 에디션'과 '퍼블리셔스 테이블'이 개최되었습니다. 책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친근하고 따뜻한 공기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곧 한 해의 마지막 달을 맞이합니다. 내년에도 책을 계기로 많은 이들과 좋은 만남이 있기를 바랍니다. 월간한옥을 살펴봐 주시는 모든 분들은 한국의 전통과 문화뿐만 아니라 글, 책이라는 물성에도 각자가 품고 있는 애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애정에 감사드리며 좋은 책을 오랫동안 만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열화당 책 박물관 ⓒ월간한옥 / 강민정
ㆍ인쇄와 제본
이제는 500g 내외의 얇고 가벼운 전자 기기를 들고 실시간으로 간격과 레이아웃을 조정하며 편한 방식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또 그 안에는 수십권, 수백권의 책을 담을 수도 있죠. 동시에 종이책이 가진 넘기는 느낌이나 질감, 소리까지 담으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최첨단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전기 하나 없이 온전히 수동의 매커니즘으로 읽는 두껍고 무거운 종이책 또한 최첨단으로 점철된 인쇄 기술 못지않게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인쇄와 제본 방식이 있습니다. 원고와 사진이 재료라면 디자인은 요리를 하기 위해 알맞은 크기와 형태로 재료를 손질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인쇄와 제본은 이를 먹을 수 있는,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조리해서 담아내는 것입니다. 책으로 존재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죠.
책에는 원고와 사진, 활자와 배치 등에 대한 고민 외에도 많은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만 비교적 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잘 디자인 된 팩 음료수 디자인 같달까요. 내용물은 음료수이지만 우리는 팩 디자인을 보고 제품을 선택하죠. 이처럼 책 제작에도 종이의 무게인 평량, 표면의 질감, 거친 정도를 나타내는 평활도부터 디지털, 옵셋 등의 인쇄 방식과 중철, 사철, 양장 등 책을 묶어 내는 제본 방식까지 많은 고민이 존재하며 좀 더 정확하고 다채로운 표현을 위해 수백 권의 책에 수작업을 곁들이기도 합니다. 이런 선택들이 모여 종이를 펼쳤을 때 느껴지는 종이의 힘이나 인쇄의 선명도와 망점, 이미지의 가시성과 활자의 가독성, 책의 무게와 손에 쥐었을 때 느낌, 페이지를 넘길 때의 촉감 등이 달라집니다.
유난스럽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유난스러움과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만드는 이들이 있고, 그런 것에 감동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책뿐만 아니라 제조의 곳곳에는 그런 노력이 존재합니다.
승정원일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ㆍ조선의 출판 동향
조선의 출판 동향은 어땠을까요. 조선은 기록의 나라라고도 합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방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수백 권이 넘는 조선의 기록이 등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물은 당연히 종이에 글로 쓰여 묶인 책으로 남겨졌으며 그 외에도 학문과 제도로써 나라를 다스린다는 문치주의를 내세운 조선은 교서관(校書館) 등 출판 관련 기관을 설치하여 유교서적, 역사책, 법전 등도 출판하고 유통하였습니다. 책을 펴내려고 군신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하는 것은 조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죠. 지금으로 치면 임금이 편집장 역할을 맡았는데, 정조는 책을 인쇄할 때 어떤 활자를 쓸지 따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발행된 책은 지금으로 치면 판권지에 해당하는 *간기를 통해 그 출처를 알 수 있었고요.
*간기(刊記): 책의 맨 앞이나 뒤에 출판한 곳, 출판연도 등을 기록한 것
책을 펴내는 것 만큼이나 모으는 일 또한 중요하게 여겨 필요한 책이 있다면 어떻게든 구하곤 했는데 예로 중국으로 가는 사신에게 책을 사 오는 일은 아주 중요한 임무였으며 중국의 서점가를 휩쓸다시피 하며 책을 사가는 조선인들의 모습이 인상 깊어 그것을 묘사한 글귀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은 책은 보관에도 정성을 다했는데요. 해충이나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포쇄를 하였습니다.
*포쇄(曝書): 책에 볕을 쬐고 바람에 쐬는 일
한편 민간 출판은 주로 절에서 불경을 인쇄하거나 서원에서는 문집을 유력 집안에서는 족보 등을 출판하였으며 국가에서 발행한 책은 무료인 경우가 많았으나 수량이 적어 어느 정도 이름난 가문이나 지방 관청까지만 배포가 되었습니다. 가격도 매우 비쌌다고 하는데, 중종 시절 유생들의 필수 서적 중 하나였던 대학과 중용의 가격은 쌀 몇 섬(한 섬이 근 200kg에 해당)과 맞먹었다고 합니다. 민간에서 백성들이 자유롭게 책을 접할 수 있도록 서점이나 도서관을 설립하자는 논의도 있었지만, 당시에 책은 고위 관료와 유력 집안 등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소유의 대상으로, 나누기보다는 집안에 대대로 물려 보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방각본과 소설 위주의 *세책업이 성행했습니다.
*방각본(坊刻本): 영리를 목적으로 민간에서 판각(板刻, 종이책을 낱장으로 목판 위에 두고 글씨를 새겨 목판을 만드는 것=각판)하여 간행한 책
*세책업(貰冊業): 조선 시대 말기에 등장한 도서 대여업으로 일제 강점기까지 존속하였음
열화당 책 박물관 ⓒ월간한옥 / 강민정
ㆍ한글로 된 책을 만든다는 것
한반도에 서려 있는 책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나요. 책에 대한 선호도 선호지만 현실적으로 책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지원책을 통해 출판 산업을 보존, 발전하려고 시도하고 있는데요. 예로 핀란드는 자국어로 된 책의 지속성을 위해 출판사, 저자에 대한 다양한 지원제도와 더불어 도서관을 통해 책을 대여할 때마다 저작권자에게 소정의 저작권료가 지급됩니다.
한국에서도 도서, 출판계의 보존과 발전을 위해 다양한 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도서정가제입니다. 그 실효성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제도의 목적 자체는 중·소규모의 서점 및 출판사가 대형 온라인 서점과 출판사와 경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지식 전달의 기초적인 매개체인 책이 시장주의적 가격경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듯 책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계는 '공간'을 중심으로 발달해왔습니다. 몽골 제국은 빠른 기동력을 가진 말을 통해 넓은 육로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으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 제국은 육로 정비에 힘썼습니다. 통치와 물자, 세금 조달 등에 용이했기 때문이죠. 삼각돛의 등장으로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이후로는 바다가 세력 싸움의 무대였습니다. 다들 우주로 나가려고 하는 이유도 우주가 가진 공간 때문입니다. 다만 아직까진 우주로 향하는 데에 너무 큰 비용과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지만요.
현대의 공간은 디지털과 웹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자원은 '정보'입니다. 전 세계 웹사이트에 존재하는 정보를 구성하는 언어별 비율을 살펴보면 영어가 60.7%로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한국어는 0.6%를 차지하고 있죠. 영어로 존재하는 정보의 양이 월등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결국 현실적으로 영어의 존재가 우등해지겠죠. 한글로 쓰인 책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한글로 존재하는 정보가 많다는 뜻이며 언어가 가진 힘의 바탕이 됩니다.
과거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이 가장 먼저 행했던 것이 모든 한반도에 인쇄 장비를 모두 일본 것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철학과 사상, 기록과 정보가 담기는 인쇄물을 만드는 인쇄기를 바꾸는 것이 문화와 민족성 말살의 시작으로 본 것입니다.
책을 만드는 것에 거창하고 대단한 의의는 없지만 그래도 한글로 된 책을 만든다는 것에는 한글로 새겨진 정보와 지식 공간을 넓혀 언어의 힘을 키우고, 나아가 그것이 민족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에 기여할 거라는 생각입니다.